율법, 육신, 성령의 관계 | 최철광 | 2021-09-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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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 육신, 성령의 관계
성도들은 구원 받았기 때문에, 성령이 내 마음 속에 임재하기 때문에 성령의 통제를 받으면서 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로마서를 보면 그 생각과 반대됨을 알 수 있다. 로마서는 사람이 구원, 즉 하나님의 의를 힘입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죄인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죄인이 하나님의 의를 힘입는 방법은 믿음이다.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믿음의 선배들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우리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그리고 다음 세대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믿음으로 구원, 즉 의롭게 되었는데, 왜 의로운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가? 로마서 6장과 7장은 율법의 통제하에 있으면서 동시에 육신의 통제하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의로운 삶을 살지 못한다고 말한다. 믿음의 사람, 구원받은 사람이 의롭게 사는 방법은 성령의 통제를 받으면서 살아야 한다. 구원받은 사람도 율법과 육신의 통제를 받고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은 동의를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율법의 시대가 아닌데, 왜 율법의 통제를 받고 있다는 것인가?라고 자문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율법의 통제를 받으면서 살고 있다. 한 가지 예를 들겠다. 코로나 19로 인하여 대면 예배와 비대면 예배의 기로에 서 있다. 많은 성도들은 정부가 비대면 예배를 강조하기 때문에 비대면 예배를 드리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통제를 받고 사는 삶이다. 법이 그렇게 규정하니까?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법의 통제를 받는 삶이다. 대면 예배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대면예배를 드렸으니까? 전통이니까? 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율법의 통제 아래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법이 그렇게 말하니까 그것이 법이요 규칙이니까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율법의 통제를 받고 사는 삶이다.
율법의 통제는 구약에서만 적응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의 삶에서도 여전이 유효하고, 많은 성도들이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 육신의 통제와 연결이 된다. 그렇게 해야 나에게 유익하다. 나의 가정, 나의 삶에 유익하다. 많은 부분이 그렇기도 하다. 우리도 모르게 법과 육신의 통제 아래서 살아가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다. 그래서 많은 경우 우리가 사는 삶은 법과 육신의 통제 아래 있다.
우리는 법이 그러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육신의 평안함이 있으니까 라고 생각하기 전에 먼저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성령이 그것을 원하시는가? 성령의 뜻과 법이 일치하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성령의 뜻이 법과 육신의 뜻과 다르다면, 기꺼이 성령의 뜻을 따르는 삶이 거룩한 삶을 사는 비결이 되는 것이다. 성령을 의지하는 삶을 훈련하다 보면 이것도 습관이 된다. 주님이 원하시는 습관이 된다.
우리는 순간순간 성령의 뜻과 이 땅의 법이나 육신의 뜻의 차이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성령을 의지하고 사는 삶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삶의 외형은 그럴 듯 하지만, 실제는 율법이나 육신의 통제를 받는 삶을 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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